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묜 부됸니 (문단 편집) === 젊은 시절 === 기마 민족인 [[카자크]]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, 진짜 카자크는 아니고 그냥 카자크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. 스무 살 때까지는 [[농부]]로 일했지만, [[말(동물)|말]]을 굉장히 좋아해 잘 부리고 잘 탔다. [[파일:external/img15.nnm.ru/6fd2050c316348d5de1951a8367.jpg|width=400]] 1903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[[적기훈장]]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닌 듯하다. 게다가 그놈의 수염 탓인지 게다가 20세가 아니라 40세로 보이니 더더욱 그렇다(...).[* 물론 당대 잘 나가던 동/서양의 남성들을 보면 수염 스타일이란 당대 문물을 받아들인 쪽 기준으론 항상 저 스타일이 흔했다.] 1904년, [[러일전쟁]] 당시 [[러시아군]]에 징집되어 [[기병]]으로 복무했다. [[전쟁]]이 끝나고도 계속 군에 남아 있었고, 1907년에는 뛰어난 기마술 덕분에 병사에서 [[부사관]]으로 올라갔다. 이후 [[상트페테르부르크]]에 있는 기병학교를 졸업하였다.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정예 용기병 [[연대(군대)|연대]]의 [[상사(계급)|상사]]였으며, 동부전선에서 카자크들로 이뤄진 [[기병]]을 이끌고 [[독일 제국군]]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. 이후 [[캅카스]] 전선에 파견되어 [[오스만 제국]]과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보여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. 그는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해서 병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. 그런데 병사에게 [[데도브시나|가혹행위]]를 하던 선임 부사관과 언쟁을 벌이다가 화를 못 참아 병사들 앞에서 싸웠고, 이후 상관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. 병사들은 부됸니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부됸니는 결국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박탈당했다. 하지만 부됸니에 대한 징계는 이 훈장 박탈로 끝났고, 상관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군법회의에 회부하지는 않았다. 이후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쳐 다시 성 게오르기 훈장을 급수별(1~4급)로 4개 더 받았다. 그러나 그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에게 연패해 거의 그로기 상태였고, 결국 지휘 계통이 무너지자 병사들은 스스로 소비에트(평의회)를 구성하고 [[투표]]로 지휘관을 선임했다. 병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던 그는 당장 지휘관에 선임되었고, 이때부터 그는 좌경화되어 [[공산주의]] 지도자가 되었다. 1919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며 이 때 [[이오시프 스탈린|스탈린]], [[클리멘트 보로실로프|보로실로프]]와 친구가 되었는데, 이것이 훗날 정치적 출세와 보신의 지름길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